2009년 01월 11일
한 후배님의 글을 읽고

* ONE WAY. 일방통행. 출처: Raincastle.net
* 의사 사회에서 '일방통행'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둘은 교육과정에 있어서.
의대와 병원이라는 공간은 유독 불만과 불평이 많이 전이되는 공간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획일화된 커리큘럼과 스케줄 아래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불평의 "수평적 전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의 "수직적 전이"이다. 의대와 병원에서 각 구성원들의 불만 사항은 매년 거의 비슷하고, 제기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각 직급마다 하는 일이 거의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제기되는 문제가 당연히 유사할 것이라 말할 지도 모르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제기하는 문제가 항상 똑같다는 점이다. 각 구성원이 제기하는 문제가 예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대와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구성원들이 밟아나가는 course는 "일방통행"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앞으로는 나아가지만 나아갔을 때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인턴인 나는 더 이상 의대를 들어갈 일이 없으며, 레지던트가 된 내 선배는 앞으로 인턴과정을 다시 밟을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하면, 군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군대는 다시 갈 일이 없지 않은가.) 이런 구조에서 자신이 밟아왔던 코스는 술 먹으면 떠오르는 추억이 되고, 후배들에게 말할 때는 일종의 무용담이 된다.
이 글을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감과 시스템에 대한 불만과 문제의식이었고, 다른 것은 추억과 무용담의 무서움이었다. 내가 의대에서 암기식 공부를 하면서 들었던 문제점을 후배님 역시 이 글을 통해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교과서와 족보(우리는 소스라 불렀다)에 나오는 너저분한 내용들을 논리적 정돈도 없이 달달 외운 후 남는 것은 그야말로 단편화된 지식에 다름 아니었고, 지금 면허를 따고 의사질을 하는 지금 그 지식들은 산산히 깨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다행히 이에 대해 많은 후배님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일부 교수님 역시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개선의 여지는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앞에서 말했듯 문제가 제기만 될 뿐 해결되지 않는 의대와 병원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많이 변해나갈 지는 미지수이다.
* 조각나는 지식들을 이어줄 수 있는 끈은 논리가 아닐까
안타깝지만 내가 본과 4년간 받은 교육에서 논리는 거의 배제되어 있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본과 4년간 받은 교육에서 논리는 거의 배제되어 있었다
문제 개선의 여지를 적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는 앞에서 지적했던 추억과 무용담이다. 기본적으로 추억과 무용담은 "미화된다". 자신이 겪은 일이 뭔가 대단한 것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치켜세워지면서 그 때의 불만과 문제점은 위대한 순간을 장식하는 하나의 장식에 다름 아니게 되어 버린다. 결국 그 문제점은 자신과 다른 사람은 거쳐온 별 것 아닌 문제로 치부되고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별 것 아닌 문제도 이겨내지 못하는 "엄살쟁이"가 되어버린다.
이 글에 달린 많은 선배들의 답글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쓰여져 있었다. "후배님의 엄살이 심하다"에서부터 시작해 "남들 다 하는 것도 못견디는 한심한 녀석"에 이르기까지. 물론 그 선배들이 밟아 왔던 길이 힘들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선배들의 그런 태도는 자신의 일천한 경험에 근거해 문제를 단순봉합해 버리려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사실 옛날 옛적의 기준에 맞추어 지금의 의대 교육을 논한다는 것도 넌센스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몇몇 선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의대 교육의 공급자인 교수님들에게까지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후배님의 글에 나와 있듯이. 점수에만 의존하는 획일적인 평가기준, 단순 암기 능력만을 테스트하는 시험문제와 커리큘럼 등등... 의대와 병원처럼 직위에 의한 인간관계가 일방적이고 경직된 사회에서 기성 의사 세대인 교수님들의 이런 현실 인식 아래 의대 교육의 문제 해결은 더욱 더 요원해 질 뿐이다.
바람직한 의대 교육의 방향에 대한 정답은 없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고민 아래 천천히 개선되어야 할 문제이다. 다행히 교육의 수요자인 많은 후배님들은 이에 대해 충분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교육의 공급자와 그들을 둘러싼 기성 의사들의 경직된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영원히 "수직적 전이"를 반복할 뿐이다.
- 2008년 10월 20일
보령아산병원에서 응급실 당직 서면서 새벽에 작성하다
(트랙백 : http://medwon.egloos.com/2105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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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1/11 21:52 | Old post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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