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Beneficialism & Survivalism

1.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상황에 따라 다양하므로 모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 준거 정도는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우리의 행동은 '이익'을 위해서라고 가정하고 그에 따라 모델을 세우고 경제상황을 예측한다. 물론 그 이익은 가장 중요한 일차적인 요소이지만 때로 우리는 그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무언가를 위해 투쟁하고는 한다. 그것은 '옳음'이며 그것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다른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옳음'은 학문의 영역에 들어와 '이데올로기(Ideology)'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는 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몇십년 간 투쟁의 세월을 거쳤다.

'빨갱이'라는 말이 있다.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그 follower들이 사용 빈도를 갑작스레 높이면서 주목받게 된 이 단어는 분단, 한국전쟁의 불행한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국내에서는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그 뜻을 알 뿐만 아니라 어른들처럼 그 대상을 경멸할 줄 아는 매우 대중적인 단어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의미는 예전에는 '공산당과 그 아이들'이라는 의미였으며 현재는 '공산주의와 유사한 사상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 내지는 '진보적이라 생각되는 언행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수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생각과 다른 뜻을 가진 사람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 정도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지금과 같이 보수와 진보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더욱 더 사랑받는 단어가 되었다. (대개는 '좌빨'이라는 변형된 단어로 많이 사용된다.)


학습만화 '따개비 한문숙어'에 나오는 '호의호식'
'빨갱이'들의 수괴 김일성은 당시 국내에서는 어린아이도 경멸하는 존재였다.
이보다 더 좋은 예인 '천인공노'파트는 아쉽게도 찾질 못하겠다. ㅠㅠ
전두환 구라 시리즈 중의 하나인 금강산댐 떡밥을 주목하라.


무참히 살해된 승복군 일가 사진. 출처는 조선일보인 것 같다.
당시 이승복 군은 무장공비에게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명언을 남기고 입이 찢겨 죽었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장공비의 잔인함을 말하지만 나는 '살려주세요'라는 한마디 대신
공산당 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뇌당한 이승복 군에게 불쌍함을 느낀다.



2.

우리 사회가 '탈이념'화 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전 우리 생각 한켠에서 우리를 지배했던 '빨갱이에 대한 공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자본주의는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민주화의 성과로 예전엔 용공세력이라는 비난과 탄압을 받을만한 글과 기사들이 신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지난 10년 간 북한과의 우호적인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북한군에 대한 공포도 많이 없어졌다. 이에 따라 상대를 빨갱이라 비난하는 정치인들의 말은 점점 유행에 뒤떨어진 말로 받아들여지고 이에 대해 불안감을 보이며 그 정치인을 무작정 지지하는 사람은 나이든 어르신들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하다.

예전 우리 사회의 행동 준거는 '잘살아 보세''빨갱이를 몰아내자'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제 빨갱이라는 존재에 대한 위협이 사라졌으며 그 개념마저 흐릿해진 지금 이념에 근거한 행동 준거는 빛을 잃게 되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잘살아 보세'라는 행동 준거 하나였다. 그리고 이는 IMF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여러 사람들에게 있어서 또다른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살아남자.'

빨간 여왕은 가만히 정지해 있기 위해 더욱 빨리 달려야 한다.
이는 너희 모두가 지금 하고 있는 것과 꼭 닮았다!!
Red Queen, in "Through the Looking-Glass" by Lewis Carroll
다른 대사: "It takes all the running you can do, to keep in the same place."



우리는 앞의 '잘살아 보세'라는 행동 준거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했다. 잘 사는 것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인가? 어려운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나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배치된다면 어떻게 중점을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잘살아 보세'라는 문장의 주어를 1인칭 단수에서 복수로 확장했어야 했다. 우리는 이를 위한 사회적인 고민을 했어야 했고 투쟁이 있었어야 했으며 그로 인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도출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를 억눌렀던 빨갱이에 대한 공포는 우리 사회가 다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는 이분법에 익숙했고 이기적이었다. 정치 집단은 자신들의 단기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흑백논리를 확대재생산했고, 종교 단체들도 상당수 그에 편승해 흑백논리를 강화했으며, 옳고 그름에 대해 제시해 주어야 할 인문학은 이미 고사 상태였다. 게다가 탈냉전 시대 이후 IMF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전체 사회 규모의 생존 경쟁에 들어갔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삶의 불안정성을 가져오고 미래에 대한 설계 이전에 짤리지 않고 붙어있을 생각만을 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이나 철학 나부랭이는 사치에 불과할 뿐, 우리는 생존을 위해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이념의 빈 자리에 "생존"이라는 새로운 행동준거를 채워넣게 되었다. 브레이크 없는 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위한 일차원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3.

우리는 모든 것을 경제적 이익에 준해서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는 선진국의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과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부러워하기보다는 그것이 벌어들이고 있는 외화를 부러워한다. 이제 흥부전에서 나오는 놀부와 흥부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 역시 의학적인 진보에 대한 평가보다는 이 연구를 통해 얻게 될 국익에 사람들은 더욱 집착했다. 이제 여성의 난자도 국익 앞에서는 불만없이 기증해야 할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경제적 이익 이외의 다른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을 지운 채 우리에게 떨어질 떡고물에만 집착하고 있다.

* 참고로 이 글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4281

네이버 웹툰 "실질객관동화" 19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중에서.
사람들은 현실적이어야 똑똑한 줄 안다.



잘 살려는 행동, 생존을 위한 행동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07년 우리는 위와 같은 행동 준거에 의거해 한 괴물을 낳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괴물은 지금껏 힘들게 얻었던 수많은 가치들,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가치마저 땅에 내동댕이치고 있다. 진실로 우리가 좀더 인간다운 사회를 원한다면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나'라는 주어 대신 '우리'라는 주어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ps. 이 만화 한번 보길 바란다. http://gall.dcinside.com/hit/7296

by 꼬마키릴 | 2009/08/23 04:00 | 본격 병맛 한국 비평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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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송군 at 2009/08/23 09:49
그러나 그런 각성을 혼자만 하면 도태될 뿐이라는 것이 맹점 아닐는지요.
Commented by 꼬마키릴 at 2009/08/23 18:30
혼자서 각성은 충분히 할 수 있겠죠. 입시제도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수험생이 반드시 대입에 떨어지는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를 행동에 옮기면 도태될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consensus가 필요하겠고 이를 통해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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